국립아시아문화전당 웹진

도청에서 도청을 말하다 움직이는 객석, 움직이는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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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라서 가능했던 것들

세월이 흐르면 기억되어야 할 것들이 잊혀진다. 그런데 기억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암기가 아니다. 경험하는 일이다. 1980년 광주 금남로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광주도청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는지 그 이름과 시간을 외우기보다 그날의 그 장면을 보는 것이 ‘그날을 가장 잘 기억하는 방법’이다. 40년이 흐른 뒤 바야흐로 맞이한 5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막이 오른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은 그 시절 도청에서 일어났을 법한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다. 도청 칠장이 영식과 그의 가족, 그리고 도청이 겪은 ‘그때의 일들’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이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는 것은 어찌보면 진정한 의미로서 ‘과거를 재현’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옛 도청 자리에 세워진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1 무대에서 도청에 대한 이야기를 연극으로 올린다는 것은 재현 이상의 의미로 해석된다. 관객들로 하여금 과거를 실제보다 더 사실적으로 경험케하고 그렇게 믿게 만들 수 있는 장소의 특정성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청 자리에 이미 극장이 들어서 있다는 환경적 상황은 도청이 품은 역사 속 그 시절을 다시 꺼내기 위한 최적의 조건이다. 아니, 다시 생각해도 엄청난 행운이다. 사실 ‘도청에 대한 이야기’는 도청자리에서, 도청대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 극장에서 올려 질것이라고 이미 운명으로 정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만약 이 공연이 서울에 위치한 여느 극장에서 공연되었다면 이 작품만이 가진 장소 특정적 매력을 완전히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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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면의 무대, 다양한 시도를 가능케 했던 신의 한 수

작품 초반부에 도청 칠장이로 일하는 영식이 벽에 칠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실제 극장 내벽이기도 한 이 공간에 매달려 벽을 칠하는 이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영식을 실제하는 인간으로 인식하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앞으로 벌어질 이야기는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극장내벽이자 극중 도청 외벽을 칠하는 장면을 시작으로 작품 속 공간들은 끊임없이 변하는데 잦은 암전과 전환이 없이 진행된다. 이는 공간의 구조와 모양을 자유롭게 변경이 가능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1의 공간적 특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지점이다. 객석을 중앙에 배치한 뒤 극장에 존재하는 모든 면을 행위 공간으로 연속 배열하여 장면을 연결성 있게 연출하였다. 그 덕에 다양한 장면적 시도가 가능하였다. 영식의 아들인 혁이가 바닥이나 벽에 그림을 그리는 장면들, 이동식 벽에 그림을 그리고 다시 칠이 덧대어지는 장면 등은 보통의 연극이었다면 가장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거나 겨우 한번 등장하기도 힘들었을 부분이다. 한번 어질러진 무대는 복구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이러한 기술적 제약 때문에 여타의 작품에서는 중반부에 이런 장면을 삽입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번 작품은 많은 무대 면을 사용하도록 디자인 되었고, 공간이 광활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게다가 객석이 연기 공간의 이동에 따라 방향 이동을 하기 때문에 무대 전환이나 암전 등 극적 흐름을 일부러 끊는 종래의 연극적 장치들은 필요가 없다는 점도 언급해봄직한 부분이다. 동선이 길면 관객의 시선이 그 동선을 따라가기 힘든 경우가 많지만 이 작품은 객석이 알아서 이동하며 공연을 관람하게 만든 시스템이므로 이것이 장애의 여지로 작용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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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연기만 해! 움직이는 건 관객이 할게.

‘시간을 칠하는 사람’은 조금 특이한 연극이다. 배우가 움직이기 않고 관객이 움직이기 때문이다. 배우들은 자기 연기 구역에서 최선을 다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장면이 바뀔 때마다 객석 양 옆에 전환수들의 동력으로 객석은 꾸준히 움직였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움직이는 객석에 앉아 이야기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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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무엇을 보지 않아야 하는가를 명확히 하라!

움직이는 객석은 방향만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 앞으로 나아갔다가 뒤로 갔다를 반복하며 무대와의 거리감을 스스로 조정하였다. 이것은 마치 영화에서 카메라가 사물을 멀게, 혹은 가깝게 보이도록 설정하는 기법과 비슷한 방식이다. 영화에서는 카메라의 기법과 편집을 통해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나 배제시켜, 보여줘야 할 것과 숨겨야 할 것을 철저히 구분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연출의 의도에 의해 완벽히 조정된 장면만이 송출된다. 연극의 경우에는 장르의 특성상 모든 환경을 컨트롤하는 것은 영화보다 어렵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움직이는 객석을 통해 영화적 방식이 연극에 적용되어 대부분의 상황이 의도대로 제시된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을 칠하는 사람‘을 관람한 관객들은 이동하는 객석에 앉아 무엇을 보아야 하고 무엇을 보지 않아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판단이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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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와 정서,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게 해준 ‘움직이는 객석’

사실 이전의 연극 작품들 중에서도 영상이나 조명, 음향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적극성, 혹은 강제성을 강조한 작품들이 있었다. 이 작품들은 명확한 메시지와 연출적 의도를 전달하는데 성공했지만 관객이 스스로 정서를 추출할 여유를 주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이번 연극에서는 객석 중간축이 마치 영화에서의 카메라 렌즈 역할을 하듯 작품의 의도대로 관객을 이동시키며 작품을 이끌면서, 관객들이 작품의 정서를 받아들여 이를 자신의 정서로 치환시킬 수 있는 여유와 시간을 주었다. 도청 앞 거리에서 처참하게 희생되었던 시민들의 모습을 그린 장면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 장면에서 객석은 어느 장면보다 분주하게 나아갔고, 객석이 지나간 아래로 쓰러진 배우들로 바닥은 낭자했다. 그 순간에 객석은 관객이 앉은 좌석이면서, 동시에 역사 속 그날에 시민들을 밀고 지나간 탱크로도 기능하였다. 관객들 역시 작품 안에서 하나의 기호로 역할을 한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객석이 움직이는 속도만큼 관객의 심장 박동도 같이 빨라졌을 것이다. 관객은 움직이는 객석에 앉은 덕분에 작품 속에서도 하나의 기능으로 작용하면서도 관객으로서 느낄 수 있는 감정적 자극도 놓치지 않고 얻어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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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청에서 도청이야기를 하는 장소 특정적 ‘연극’

1970년대 서구 미술계에서는 ‘장소 특정적 미술’이라는 개념이 유행했다. 특정 장소에서 장소적 특징을 살린 작품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는다던 이 개념은 연극에도 활용되어 사실성과 환상성이 공존하는 모순적 매력을 발생시켰다. 역사 속 그 순간에 대해 담담히 외친 이번 연극은 ‘현상을 경험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며 장소 특정적 연극이 가진 매력을 십분 발휘하였다. 이 작품이 도청의 기억을 품고 태어난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극장에서 공연되었다는 점 또한 작품의 농도를 진하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연극 ‘시간을 칠하는 사람’은 작품을 풍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서 공간이 ‘열일’한 작품이라 볼 수 있겠다.





  • 글. 나여랑 hwarangsu@naver.com
    사진. 극단 하땅세

    20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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