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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박물관” 문명의 뒷마당을 거닐다


광주초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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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에 쟁기를 메어 밭을 갈고, 손맛 좋은 낫으로 꼴을 베어오던 여름 날. 저물녘 굴뚝에는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오르고 구수한 가마솥 밥 냄새가 담장을 넘어가던 가을날. 화롯불 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부젓가락으로 군밤을 뒤적이던 긴긴 겨울밤이 있었다. 미처 살아보지 못한 그 옛날이 가슴 뭉클한 그리움이 되어 눈앞에 펼쳐진다. 어느 아낙이 이듬해 봄에 심을 씨앗을 정성껏 갈무리해두었을 뒤웅박부터 가난한 살림에도 자식들 밥은 꾹꾹 눌러 담았을 밥사발. 한평생 두루마기와 갓을 포기하지 않았던 노인의 오랜 품위를 지켜주었을 낡은 갓솔. 어린 누이가 출렁출렁 이고 오던 물동이... 그 이름 없는 필부필부의 삶이 고스란히 살아 숨 쉬며 저마다의 이야기를 건네 오는 곳, 비움박물관. 천천히 느리게 걸어보고 싶은 세월의 뒤안길이 그곳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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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박물관 이영화 관장

새마을운동으로 빠르게 사라져간
우리네 전통문화
버려진 물건들이 애달파서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던 한 여인



공장도 없고 기계도 없던 시절. 플라스틱과 일회용품 대신 손때 묻은 함지박 하나면 수년을 거뜬히 사용하곤 했다. 필요한 것은 뭐든 손수 만들어 썼기에 어느 것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비닐봉지 대신 보자기와 바구니를 사용했고 플라스틱 그릇 대신 물려받은 사기그릇으로 밥을 먹었다. 전기다리미 대신 다듬이를 두드려 식구들의 옷을 정갈히 손질했다. 오래전 이야기 같지만 불과 50여 년 전의 일이다. 부족했지만 불편한 줄 몰랐던 우리네 삶의 모습은 1970년대 새마을운동과 함께 빠르게 사라져갔다.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돌담이 허물어지고 낡고 오래된 물건들은 버려지고 불태워졌다. 옳은 방향인지 그른 방향인지 분간할 새 없이 그 모든 변화가 너무도 빠르게 찾아왔다. 시간은 흐르고 세상은 변한다지만 그래도 너무 쉽게 변해버린 건 아닌지... 그 시절을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던 이가 바로 비움박물관 이영화 관장이다.

이영화 관장/ 비움박물관

“제가 결혼하고 얼마 안됐을 때 새마을운동이 시작됐어요. 오랫동안 전통문화 속에 살던 사람이 20대 초반에 그런 것들이 사그라지는 모습을 바라보는 심정은 참 묘했어요. 저보다 더 연세 드신 분들이 자자손손 쓰던 물건을 너무 쉽게 버리는 것을 보면서 인간의 속성이 이런 것인가 하면서 슬펐던 기억이 있어요. 그때부터 버려지는 물건들을 모으기 시작했어요.”

50여 년 전 버려진 쓰레기 더미에서 증조할아버지의 사진을 발견한 뒤, 증조할아버지가 생전에 사용하던 담뱃갑, 안경집, 갓솔 등을 따로 챙겨놓았다. 그때부터였다. 한때 우리네 삶과 함께 했지만 이제는 쓰임을 잃은 옛 물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 그렇게 스무 살 새색시가 70대 할머니가 되도록, 반백년이 넘는 세월 버려진 물건들을 모아왔다. 쓰레기를 줍는다며 욕을 먹기도 했고 정신이상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버려진 물건들이 너무도 애처롭고 안쓰러워 저절로 손길이 갔다. 집안에 보관할 양을 넘어서자 창고를 빌려 수년 동안 자식처럼 쓸고 어루만지기를 계속했다. 아무리 바빠도 하루에 두세 시간씩은 쓸고 닦으며 사람의 온기를 불어넣었다. 현재 비움박물관에 전시된 2만여 점의 민속품이 모두 이영화 관장의 손에서 갈무리된 물건들이다. 처음부터 박물관을 계획해서 준비한 일이 아니었고 한 해 두 해 물건들이 쌓이다 보니 박물관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16년 3월. 비움박물관은 그렇게 우리 곁으로 찾아왔다.

이영화 관장/ 비움박물관

“비움박물관에 있는 민속품들은 사대부들이 쓰던 값비싼 물건들이 아니에요. 하나같이 우리 민중들이 사용하던 생활용품들이에요. 나한테 40년 전에 들어온 것은 40년 동안 닦아준 것이고 몇 년 전에 들어온 것은 몇 년을 닦은 것이고.. 지금 현재는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지만 이곳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하나의 작은 연장이 되길 바랐어요. 문명사회, 기계가 지배하는 시대에서 현대인들의 마음을 흔들 수 있는 작은 연장이 되었으면 하고 박물관을 꾸리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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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품 2만여 점으로
2016년 3월 비움박물관 개관
어느 미술작품보다 소중한
민초들의 예술품



광주 대의동. 복잡한 도심 큰길가에 자리한 5층짜리 건물. 이곳에 비움박물관이 들어서 있다. 현대 도심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문명의 뒷마당이다. 올해로 개관 3년째. 어르신들에게는 옛 세월을 다시 만나는 추억의 장소로, 아이들에게는 선조들의 생활문화를 접하는 배움터로 인기를 얻고 있다. 비움박물관을 찾은 날도 어르신들과 초등학생 관람객들로 북적였다. 1층부터 5층 옥상까지 세월의 장터 봄, 여름, 가을, 겨울 네 가지 주제로 옛 민속품들이 빼곡하게 전시돼 있다. 한 사람의 손에서 이 많은 물건들이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민속생활용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부터 100년 사이에 사용했던 실생활용품들이라는데 이름도 모양도 생소했다. 수수께끼를 푸는 느낌으로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쓰임새가 짐작이 되지 않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꼭두, 흙손, 목단단지, 부삽, 떡살, 물레, 골침베개 등.. 그 옛날 부엌과 대청마루에 당당하게 자리했던 물건들이 이제는 전시품의 이름으로 수줍게 인사를 건네 온다. 어느 값비싼 미술작품보다도 더 많은 이야기를 간직한 우리 민초들의 예술품이다.

이영화 관장/ 비움박물관

“사대부가에서 썼던 고미술품이나 비싼 그림은 다 모아놓고 돈 있는 사람들, 명예로운 사람들, 권력 있는 사람들이 가졌는데 이 버려진 것은 아무도 거들떠보지를 않았어요. 찢어지고 어긋난 것들을 제 손으로 모으고 복원을 하면서 우리 문명인들에게 자리 잡기를 바라고 제 뜻대로 그냥 세워놓은 거예요. 소수의 감상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고미술이라면 대다수의 국민이 만들어 쓰던 것들이 민속품이잖아요. 저는 그것이 진정한 예술품이라고 생각해요.”

도시마다 지역마다 거대한 박물관과 미술관이 들어서있고 그곳에 가면 언제든 화려한 현대미술을 접할 수 있는 요즘. 우리의 옛 것들을 만나볼 수 있는 장소는 흔치 않다. 국가 정책도 국민들의 의식도 우리 것보다는 서구의 것을 선호하고 쫓아간다. 우리에게 이다지도 소중한 문화유산이 있는데 왜 남의 것만 바라보는지. 요즘의 현실이 이영화 관장은 가장 안타깝다.

이영화 관장/ 비움박물관

“부엌을 지키는 조왕신. 아이를 낳게 해주는 삼신할머니. 우리 집을 지켜주는 성주신이 있는데 우리는 그것들을 다 던지고 오로지 그리스로마신화만 찾는 것 같아요. 언론들도 하다못해 코카콜라 병 전시하는 것을 소개하면 했지 우리 옛 것에는 관심을 안두잖아요. 우리 것에 눈을 안 돌린다는 사실은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함부로 했던 반증이라고 생각 해요. 유럽에 가서 오래된 양주병을 가져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이 부끄러운 현실 앞에서 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흔들고 싶은 생각을 해봐요. 나는 그날이 꼭 오리라고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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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많은 이들에게
우리 것의 소중함을 전하고자
찾아가는 박물관 기획



우리의 전통문화를 돌아보지 않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슬며시 흔들어놓고 싶다는 올해 일흔 둘 이영화 관장의 소망. 비움박물관을 찾는 이들을 위해 마이크를 잡고 재미난 해설을 하는 한편, 각 기관과 협약을 맺어 ‘찾아가는 박물관’을 진행하고, 아이들의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각 계절에 맞는 기획전시를 준비하고.. 여느 젊은 청년 못지않게 에너지가 넘친다. 우리 것에 대한 깊은 애정과 자부심이 있기에 가능한 일들일 것이다. 수많은 버려진 물건들을 예술품으로 재탄생시켰듯이 현대인들의 마음에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을 불러일으키는 날도 반드시 올 것만 같다.

이영화 관장/ 비움박물관

“우리나라 사람들 모두 너무나 함부로 했던 물건들. 바로 요즘 얘기하는 흙수저들이 만들어 썼던 물건들이에요. 지금도 흙수저 알기를 우습게 알잖아요. 저는 지금도 당당하게 말하고 싶어요. 금수저는 인간을 기르는데 아무 필요가 없다. 금이 없어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어요. 하지만 흙이 없으면 못살죠. 없어서 못사는 것은 함부로 하는 근성을 바꾸는 좋은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우리네 흙수저들의 오랜 삶의 흔적을 갈무리해온 반백년 세월. 그 물건들을 쓸고 닦는 세월 동안 이영화 관장은 자연스럽게 시인이 되었다. 비움박물관 곳곳에 민속품들과 함께 전시된 이영화 관장의 자작시들이 인상 깊다. 그 중 하나를 옮겨본다.

밥사발 - 이영화

어디
꾸민 구석이라고는
없는 흰 그릇

시작도 끝도
없는 동그라미

왠지 모를 자존감으로
불끈 솟아 오르는 힘

한반도에서
그냥
살다간 사람들의
건강한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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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도 없고 기계도 없고 자동차도 흔치 않던 시절. 그때 우리는 정말 가난했을까. 온갖 물건이 넘쳐나는 지금, 우리는 진정 풍요로워 진걸까. 비움박물관을 나서며 스스로에게 곰곰이 묻게 된다. 물질은 풍요로워졌지만 마음은 더 가난해진 것이 아닌지. 진정한 풍요로움은 물질의 풍족함이 아닌 작은 것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 있는 것이 아닌지... 그 대답은 비움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비움박물관
광주광역시 동구 제봉로 143-1(대의동 2-1)
062-222-6668

  • . 유연희 heyjeje@naver.com
  •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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