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아시아문화전당 웹진

비랑고나 이야기 전쟁과 여성의 삶


아시아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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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육군 주둔지 벽에 그려진 그림들 ㅣ 방글라데시 독립전쟁박물관 제공

전쟁은 필연적으로 희생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희생은 특히 사회적 약자에게 더욱 빈번하고 가혹하게 요구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들을 다시금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받게 되는 부당한 시선들이다. 이를테면 환향녀, 위안부 등의 역사적 사례를 들 수 있는데, 이는 단지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인도아대륙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는 벵골의 나라 방글라데시에는 ‘비랑고나(Birangona)’ 라고 불리는 여성들의 이야기가 그러하다.

방글라데시는 1971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하여 건국된 신생국가이다. 독립 전쟁을 치르는 과정에서 서파키스탄(현재의 파키스탄)군과 그 부역자들에게 붙잡힌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 여성들은 강간, 고문 등의 심각한 폭력에 노출되었으며, 피해를 입은 여성의 수는 대략 20만 명으로 추정된다. 독립 직후 새롭게 수립된 방글라데시 정부는 이러한 여성들에게 ‘용감한 여성’이라는 뜻의 ‘비랑고나’라는 호칭을 부여함으로써 자유를 쟁취하는 과정에서의 여성들의 희생을 기리고 그들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방지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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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군과 부역자들에게 붙잡혀 집단 성폭행 당한 여성들의 사연을 다룬 기사 ㅣ 방글라데시 독립전쟁박물관 제공

그러나 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비랑고나의 호칭은 피해 여성들에게 사회적 배려와 존중보다는 ‘추락한 여성’혹은 ‘더럽혀진 여성’이라는 뚜렷한 꼬리표로 인식되었다. 심지어 벵골어로 비랑고나(Birangona)는 매춘부를 뜻하는‘바랑가나(Barangana)’와 발음이 비슷해, 대중들 사이에서는 이들을 조롱하는 의도로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비랑고나의 호칭을 부여하는 것은 교육이나 일자리 지원, 공공의료 등의 혜택을 제공하기 위함이기도 했는데 정작 이러한 혜택을 받기 위해서는 사회적 편견과 오명을 무릅쓰고 모두에게 강간 피해 여성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아이러니한 전제조건이 요구되었다.

당시 방글라데시 정부는 피해 여성들이 하루 빨리 사회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데 힘썼다. 이를 위해 1972년에는 재활 센터를 설립하여 그들의 조기 회복을 돕고, 강간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의 해외 입양을 주선했으며, 피해 여성들의 결혼이나 직업 훈련을 도왔다. 전쟁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한 방글라데시 정부의 이와 같은 움직임은 세계 역사상 전례 없는 일이라 할 만큼 빠르고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 방침은 피해 여성들이 마땅히 요구해야할 진상규명과 가해자 처벌보다는 이들의 조속한 사회 복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가해자들이 파키스탄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처벌과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부역자들은 달랐다. 파키스탄 군인들에게 협력했던 이들은 현재까지 방글라데시에 남아있으며, 심지어 최근에는 다시금 정치 무대로 돌아가기 위한 시도를 하고 있다.

독립 직후 떠들썩했던 비랑고나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시들었는데, 1992년 이후 다시 한 번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기 시작했다. 몇몇의 좌익 활동가들이 방글라데시 내 부역자들의 전범 재판 회부를 요구하며, 세 명의 비랑고나들을 언론에 내세운 것이다. 대서특필된 기사 속 그녀들의 모습은 사진 아래에 쓰인‘저항’이나 ‘영웅’과 같은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군중과 카메라에 둘러싸인 채, 함께 모여 쭈그리고 앉아 있는 그녀들은 겁먹은 듯 했고, 곁눈질로 카메라를 바라볼 뿐이었다.

이렇게 찍힌 사진들은 그간 막연히 단어로만 인식되어온 20만 명의 비랑고나들에게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부여했다. 그들은 누군가의 딸이자 아내였고, 엄마이기도 했다. 이후 한 비랑고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는 강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마치 발밑의 땅이 갈라지는 듯 했어요.”, “그들은 우리를 트럭에 올라타도록 했어요. 그리고 우리의 사진을 찍어대는 (백인들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할 것을 요구했어요.”여성은 화난 목소리로 되물었다. “우리가 어디로, 왜 가는지 말해주었어야 하지 않나요?”

몇몇 인권운동가들은 피해 여성들 모두를 ‘강간으로 인해 트라우마와 물리적 고통을 겪으며, 가족들로부터 내쳐진, 그러나 끝까지 싸우는 여성 전쟁 영웅’으로 묘사한다. 거대한 전쟁 담론은 피해 여성들이 살아온 각각의 삶의 모습과 그 안의 사정들을 하나의 거푸집 속에 집어넣고 똑같은 모양으로 해석해낸다. 이것은 의도하든 하지 않았든 피해 여성들 각자의 다양하고 복잡한 경험을 지워내고 단순화하는 시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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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군의 지속적인 집단 강간으로부터 구출된 소녀들에 관한 기사 ㅣ 방글라데시 독립전쟁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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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라카티 평화위원회 위원장이 동료에게 보낸 편지. 베그 소령에게 보낼 여성들을 데려오라는 내용이다.
ㅣ 방글라데시 독립전쟁박물관 제공

성폭력 문제를 다룰 때면 종종 ‘2차 가해’라는 표현이 사용된다. 피해 사실을 근거로 피해자들에게 모욕이나 배척의 발언과 행동을 가하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2차 가해의 핵심은 이미 힘든 시간을 겪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잘못된 관념과 가치관을 들이밂으로써 추가적인 고통을 가중시킨다는 데 있다. 나는 옳다고 믿지만 정작 피해자들은 원치 않는 정의와 목표를 추구한다면, 이 역시 2차 가해가 아니라 할 수 없다.

비랑고나들은 전쟁 중에는 파키스탄군과 부역자들에 의해 고통 받았고, 전쟁 직후에는 선택의 여지없이 강간 피해여성이라는 꼬리표를 달아야했으며, 상처가 아물 때쯤에는 다시 타인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어야 했다. 이 모든 과정 속에 그녀들의 자발적 선택은 부재했고, 매번 힘을 가진 누군가의 요구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이들 모두가 자신만의 삶을 살아내는 주체적인 존재라는 사실은 쉽게 잊혀졌다.

지난 해 12월, 아시아문화원 민주평화교류센터는 방글라데시 독립전쟁박물관(Liberation War Museum)과의 협력 전시 <그녀의 이름은(Her Name Is)>을 통해 방글라데시 근현대사 속 여성 인권 문제를 다루었다. 전시는 여성의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수동적인 약자’로서의 여성에서 ‘역사의 주체(agency)’로서의 여성으로 그 관점을 달리 하였다.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 속 여성의 모습은 각기 달랐다. 편협한 인식으로 지레 짐작하지 않고 그들의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우리는 비로소 거대한 전쟁 담론에 가려져있던 여성들의 진정한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여성들의 목소리에도 변화가 생겼다. 특히 남성 지배적 이데올로기의 발현으로서 전쟁과 그 속에 피해자로 위치했던 여성들 역시 숨죽이던 세월을 벗어나 조금씩 자신의 이야기를 내뱉게 되었다. 전쟁의 생존자와 그 후손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나’의 관점에서 그들 대신 싸우는 것이 아니라 피해 당사자가 하고 싶은 말, 그들이 요구하는 메시지가 세상에 더 잘 전달될 수 있도록 굳건히 지지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 이 글은 《전남일보》 2020년 10월 8일자에 실린 칼럼입니다.

  • 글. 이효정
    현, 아시아문화원 아시아문화연구소 연구원

    20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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