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를 일구다
한새봉두레
아파트가 즐비한 도심 속에서 ‘탈탈탈’ 탈곡기 소리가 들려온다. 박물관에서 잠자고 있을 홀태도 제 한몫 단단히 하는 일꾼으로 나선다. 모내기철이면 못줄대기와 모잽이들이 한 줄 한 줄 박자 맞춰 손모를 심고 추수철이면 낫으로 베어진 벼 이삭들이 가을 햇살에 말라간다. 숲놀이터에서는 아이들이 그네를 뛰며 깔깔거리고, 텃밭에는 보랏빛 코끼리마늘꽃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키를 키운다. 속도와 경쟁, 물질과 자본이 점령한 세상 속에서 삶의 뒤안으로 밀려난 것들이 여전히 제 존재를 빛내는 곳. 그리고 조금은 더디 가자고, 혼자가 아닌 함께 가자고 손짓하는 곳. 자연과 사람이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곳은 일곡마을 한새봉농업생태공원이다. 우리가 꿈꾸는 오래된 미래가 그곳에 있다.
#‘함께’ ‘같이’의 소중함을 아는 공동체 정신
#개구리논 공동경작으로 ‘한새봉두레’ 출발
지난 8월. 믿기지 않을 만큼 기록적인 폭우가 광주 전남에 쏟아졌다. ‘한새봉농업생태공원’도 침수피해를 비껴가지 못했다. 빗줄기가 가늘어질 무렵, 한새봉농업생태공원에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든다. 한새봉두레 운영진과 회원들이다. 흙탕물에 잠긴 의자와 농사도구를 씻어내고, 텃밭을 덮친 토사를 퍼 옮기고, 물길을 터주고, 등산로를 정비하고... 온몸이 땀투성이가 되도록 쉼이 없다. ‘한새봉두레’의 공동체 정신이 유감없이 발휘되는 순간이다. 늘 그렇다. 어려울 때면 어디선가 사람들이 나타나 산더미 같았던 일이 시나브로 해결된다. 토종씨앗밭 김매는 날, 다랭이텃밭 풀 베는 날, 개구리논 피 뽑는 날, 연못 청소하는 날, 손 모내기 날, 벼 베기 날...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들도 두레 사람들이 나서면 거뜬하다. 개인주의가 뿌리 깊은 요즘, ‘함께’ ‘같이’의 소중함을 아는 한새봉두레의 일상이다.
한새봉농업생태공원 방문자센터 정수미센터장
일곡마을 한새봉자락에 옴팍하게 안긴 한새봉농업생태공원. 이곳에는 재미나고 신기한 것들이 많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폴짝대는 개구리가 많아 이름 붙은 개구리논, 산자락 아래 층층이 앉아있는 다랭이텃밭, 달랑 밧줄그네 하나가 달렸지만 코로나시대에 더 사랑받는 숲놀이터, 찾는 이들의 쉼터가 되어주는 방문자센터, 그리고 이 모두를 아늑하게 감싸주는 한새봉이 있다. 아파트 뒷길을 걷다 문득 눈에 들어오는 초록빛 평화로운 풍경들. 예기치 않은 행운을 만난 느낌이다. 한새봉두레와 한새봉농업생태공원의 출발은 1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소중한 것, 지켜야 할 것을 알아보는 귀한 눈에서 시작됐다.
정수미 센터장/ 한새봉농업생태공원 방문자센터
“그때 ‘한새봉숲사랑이’라는 단체와 ‘녹색연합’이 한새봉 숲모니터링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산에서 내려오다 보니까 여기에 논이 있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갑자기 산 아래 논이 나타나니까. 마침 논에 노부부가 계셔서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눴는데 할아버지가 몸이 아프셔서 더는 농사를 짓기가 어렵다고 하시더라구요. 그때가 시작이었어요. 그럼 우리가 농사를 한번 지어보자. 할아버지에게 저희 뜻을 전하고 논을 빌려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게 한새봉두레의 출발이었어요.”
환경단체와 일곡마을 주민들이 함께 모여 ‘한새봉두레’를 꾸리고 이듬해부터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개구리논’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해오름식을 열었다. 한새봉 산신님께 농사짓기를 고하고 논두렁을 밟고 시루떡을 나누고... 기껏해야 텃밭체험이 고작인 도심에서 주민들이 직접 벼농사를 짓다니. 전에 없던 새로운 세상이었다. 그렇게 한새봉 자락에 ‘개구리논’의 이야기가 시작됐다. 초보 농사꾼들이었지만 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는 친환경 농법만을 고집했다. 800여 평의 작지 않은 규모였다. 써레질부터 모내기, 김매기, 벼 베기, 탈곡까지 농사의 크고 작은 과정을 기계가 아닌 사람의 힘으로 해냈다. 단순한 먹거리의 생산이 아닌 쌀 한 톨의 소중함, 생명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새봉두레 개구리논팀장 김영대
김영대 / 한새봉두레 개구리논팀장
“개구리논의 공동 벼농사를 지으면서 농사는 사람만이 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들이 더불어 짓는다는 걸 알게 됐어요. 단순히 식량을 생산하는 것 이외에 다양한 생물들을 만나는 과정이었습니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우리가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개구리논을 통해 배우게 됐지요. 마을에 사람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명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 모두가 함께 연결돼 있다는 걸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자연도 사람도 함께 잘사는 ‘더불어 살이’
#개구리논을 중심으로 생태계와 마을공동체가 회복되다
사람들끼리 잘 먹고 잘사는 것이 아닌 모든 생명이 함께 잘사는 세상. 바로 한새봉두레가 생각하는 진정한 ‘더불어살이’다. 한 해 한 해 친환경 농사를 지으면서 개구리논에 다양한 생명들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도롱뇽부터 물방개, 물장군, 장구애비, 풍년새우 등 논 생태계가 건강하게 회복된 것이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개구리교실’을 열어 논생물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엄마 손 잡고 개구리논을 찾은 아이들이 사람 역시 생태계의 한 존재임을 온몸으로 깨달아갔다.
회복된 것은 생태계만이 아니다. 개구리논을 중심으로 마을공동체도 되살아났다. 이른 봄부터 늦가을까지 함께 농사일을 하니 이웃 간의 정이 절로 쌓여갔다. 그 힘으로 한새봉두레도 한층 성장할 수 있었다. 2010년에는 개구리논이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꼭 지켜야 할 자연유산’에 선정됐고 다랭이텃밭도 생겨났다. 2013년 즈음 주민자치사업으로 개구리논 위쪽 산자락에 마을 텃밭을 일궈 주민들에게 분양했다. 감자꽃, 쑥갓꽃, 유채꽃, 도라지꽃, 가지꽃... 철마다 피어나는 채소꽃이 그 어느 화원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한다.
2015년에 들어선 ‘한새봉농업생태공원’은 마을 주민들의 소중한 쉼터이자 아이들의 생태학습장으로 사랑받고 있다. 어린이 숲놀이 프로그램, 한새봉생태안내자과정, 손바느질, 텃밭음식 프로그램, 마을 드로잉 등 이곳을 중심으로 다양한 공동체 활동들이 이어져 마을 곳곳에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간다. 지지난해부터는 도시농부장터인 ‘개굴장’도 열려서 사람과 이야기와 정이 넘실거리는 새로운 마을문화를 일궈가고 있다. 이 모두가 산자락 아래 작은 논에서 시작된 일이다.
2018년의 여름날, 첫선을 보인 ‘한새봉 개굴장’. ‘이야기가 폴짝대는 도시농부장터’라는 부제처럼 도시에서 소소한 농사를 짓는 도시농부들의 생산품이 사고 팔린다. 그저 물건과 돈이 오가는 장터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 정이 오고 가는 장터다. 텃밭에서 농사지은 열무, 배추, 무 등 농산물부터 맛깔스러운 텃밭 요리들, 개구리논 쌀로 만든 개구리 와플, 한땀 한땀 손바느질한 수공예품... 대형 마트에서 볼 수 없는 정성 가득한 물건들이 장터를 채운다. 일회용품 없는 제로웨이스트 장터, 기후변화 캠페인, 소박한 야외음악회, 한새봉두레 회원들의 드로잉 전시회, 다양한 체험프로그램 등 해가 갈수록 더욱 알차고 풍성한 마을잔치로 꾸며지고 있다. 개굴장이 출발한 지 어느새 삼 년. 올해는 코로나 영향으로 운영에 제약이 많았지만, 여전히 개굴장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다. 한새봉 아래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돈'이 아닌, 환경과 사람을 바라보는 개굴장. 한새봉두레의 ‘더불어살이’ 철학을 온전히 담아내는 아름다운 장터다.
노희상 공동대표/ 한새봉두레
“논도 있고 밭도 있고 연못도 있고 산도 있고... 도심 속에서 이런 공간을 찾기가 정말 힘들어요. 이런 곳을 발굴해서 유지한다는 것이 한두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한새봉두레가 있으니까 가능한 일이지요. 농사만을 짓기 위한 곳이 아니고 미래세대나 도심에 사시는 분들이 체험하고 힐링할 수 있는 공간이거든요. 농약도 안되고 비닐도 안되고 모든 관리를 직접 손으로 다해야 하니까 굉장히 힘든데도 이 공간의 소중함을 아니까 계속해가는 거지요.”
한새봉두레 노희상 공동대표
토종벼농사, 토종씨앗밭, 씨앗도서관까지
사라져가는 우리네 토종씨앗을 지켜가다
한새봉두레가 꾸려진 지 어느새 10여 년. 개구리논 공동경작으로 사라져갈 논습지를 되살린 것처럼 한새봉두레는 10년 세월 참 많은 것들을 지켜내 왔다. 환경을 살리는 친환경 농법은 토종볍씨를 지키는 토종 벼농사로 이어졌다. 멧돼지찰, 아가벼, 자광도, 모태벼, 옥도... 이름도 정겨운 토종볍씨들이 올해도 하얀 벼꽃을 피워낸다. 수확량은 적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토종볍씨를 지켜간다는 뿌듯함이 크다.
다랭이텃밭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토종씨앗밭에는 다양한 토종 작물들이 어우러져 자라난다. 코끼리마늘, 앉은뱅이밀, 곰보배추, 조선배추, 사과참외, 토종 우엉 등 외국계 종자회사에 밀려 사라져간 우리 씨앗들이 부지런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대를 이어오던 우리 씨앗을 지키는 일은 다름 아닌 우리의 주권을 지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새봉농업생태공원 방문자센터의 작은 공간에는 씨앗도서관도 꾸렸다. 토종씨앗들을 보기 좋게 전시하고 씨앗과 생태에 관련된 다양한 활동들도 펼쳐간다. 특히 한새봉두레 운영진이 개발한 ‘씨앗만다라’ 놀이는 어른, 아이 모두에게 인기다.
모든 사라져가는 것들, 하지만 꼭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것들을 지켜가는 한새봉두레. 한새봉두레의 10년 세월은 ‘북부순환도로’로부터 한새봉을 지켜온 시간이기도 하다. 개구리논 벼농사를 짓기 시작했던 2009년 즈음. 한새봉을 잘라서 도로를 낸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광주 북구 용두동과 장등동을 연결하는 ‘북부순환도로 1구간’ 공사. 한새봉을 잘라내 터널을 뚫고 다리도 일곱 개나 놓는 대공사였다. 한새봉 자락에 이토록 아름다운 생명의 노래가 가득한데 도로가 웬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간 한새봉에서 생태활동을 펼쳐온 ‘한새봉숲사랑이’ 회원들과 한새봉두레를 중심으로 마을 주민들이 움직였다. 토론회를 하고, 반대 시위를 하고, 손에 손을 잡으며 인간 띠를 잇고... 그렇게 눈물겨운 십 년 세월을 보냈다. 현재 ‘북부순환도로 1구간’ 공사는 환경영향평가 재협의로 인해 잠정 보류된 상태다. 근본적인 계획을 철회하지 않은 이상 언제 또다시 닥쳐올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새봉을 온전히 보존하기 위해, 그 넉넉한 품에서 우리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한새봉두레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개구리논 벼농사에서 출발한 프로젝트가 마을공동체를 춤추게 하고, 토종씨앗을 지키고, 이제 마을을 넘어 도시 전체로 생태인문학의 향기를 퍼트린다. 몇몇 가족으로 시작했던 한새봉두레 회원들도 이제는 100여명이 넘는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한새봉두레의 힘이다. 코로나에 기후변화에 더없이 소중해진 자연의 가치를 되새기는 일. 이웃과 더불어 우리네 삶을 사랑스레 가꾸는 일. 그리고 우리가 잃어버린 오래된 미래를 되찾는 길에 한새봉두레가 소중한 징검다리가 되고 있다.
진혜숙/ 한새봉두레 회원
“한새봉은 제 인생2막의 무대지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만나 새로운 길로 들어서게 해준 곳. 가장 힘들고 괴로운 날들의 모퉁이를 돌아 만난 곳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내게 위로가 된 곳입니다. 함께 하는 사람들 덕에 나를 성장시켜준 곳이기도 하지요.”
김은미/ 한새봉두레 회원
“한새봉에서 우리 아이들 모두 건강하게 키울 수 있었어요. 아이들은 개구리논과 다랭이텃밭에서 뛰어놀고 저는 마을 활동들을 통해서 성장하고요. 제가 사는 곳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것에 정말 감사하고 계속 지켜갔으면 좋겠어요.”
김육남/ 한새봉두레 회원참여팀장
“바쁜 일상에서 이곳에 오면 마음이 탁 트여요. 바람이 불어오면 초록 벼가 흔들리고 그 여유로움에 모든 걱정거리가 사라지는 느낌이지요. 다랭이텃밭과 개구리논 공동경작을 하면서 사람 사는 정을 느끼고 고마움을 느끼고... 이런 게 즐거운 삶이 아닐까 싶어요.”
정수미 센터장/ 한새봉농업생태공원 방문자센터
“코로나19로 인해 공원의 역할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쉬어갈 수 있는 소중한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 공원을 지키고 가꾸면서 생태적, 환경적 가치도 점점 확장되는 공간이 되길... 그 길에 한새봉두레가 함께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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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유연희 heyjeje@naver.com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
한새봉두레 제공
20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