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슬픔을 오래도록 바라보다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ACC


- 왜 우리는 새해에 전쟁을 이야기해야 하는가?
우연과 광기의 역사. 살아있는 지뢰.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이 2022년의 첫 공연으로 〔전쟁 후에(AFTER WAR)〕를 발표했다. 새해가 동터오는 이 시점에 전쟁을 이야기한다니... ‘전쟁’이라는 이 무거운 주제를 두고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일까? 전쟁의 상처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 잠을 설쳤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작동한다. 게다가 이 작품의 출발은 베트남전(1955~1975)을 소재로 한 소설이다. 박정희 정부의 파병 제안, 그렇게 얻어낸 미국의 경제 원조. 그리고 민간인 학살과 성폭력 등의 적잖은 과오를 남겨두었다는 땅. 이곳을 어떻게 들여다보려는 것일까? 가슴 아픈 이야기들을 나는 상상할 뿐이다.

조금 무거운 호흡으로 ‘전쟁이 진행 중인 국가’라는 키워드를 검색하자 중동과 아프리카의 오랜 갈등부터, 미얀마의 내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에 일촉즉발의 긴장이 조성되고 있고, 북한은 동해상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쏘았다는 소식마저 들려온다. 아차... 대한민국 또한 휴전 중이라는 사실. 전쟁은 감춰진 지뢰처럼 여전히 우리의 발밑에 꿈틀거리고 있다.


- 4년 전 출발한 이야기, 동양과 서양을 오가다.
「전쟁의 슬픔」과 「슬픔과 씨앗」으로
그리고 [전쟁 후에(AFTER WAR)]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여기 4년 전에 출발한 이야기가 있다. 2018년 제2회 아시아문학 페스티벌 아시아문학상 수상작 「전쟁의 슬픔」. 작가 바오 닌의 자전적 소설로 주인공 끼엔과 프엉의 전쟁 속 사랑과 상처, 슬픔을 그려낸 작품이다.

ACC는 이 작품을 국내외 공연예술가와 제작자가 교류, 연구, 창작하는 콘텐츠로 발전시켜 나가고자 덴마크(NTL-OT)1], (사)한국공연프로듀서협회와 손을 잡고 2019년 창·제작 워크숍을 진행했다. 소설 「전쟁의 슬픔」은 그렇게 연극으로의 재탄생을 준비했다.

2020년 연출자 엘리자베스 마리 라벡 방케(Elsebeth Marie Rahbek Banke)와 공동연출 이동일(Lee Dongil)은 한국과 덴마크를 오가며 작업한 시범공연 「슬픔과 씨앗」(덴마크/NTL)과 「전쟁의 슬픔」(한국/극단민들레)을 영상으로 발표했다. 하나의 텍스트가 한국과 덴마크, 동양과 서양, 서로 다른 시각과 연극 언어로 두 개의 공연이 되었다.

2021년 드디어 이번에는 두 극단이 앞서 작업한 두 개의 작품을 하나로 연결 짓는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바로 [전쟁 후에(AFTER WAR)]가 탄생한 것이다. 4년의 여정을 거쳐 한국과 덴마크를 오가며 만들어진 변증법적인 시도가 하나의 연극이 되어 드디어 2022년 1월 27~30일 세계 초연으로 ACC 예술극장1의 무대에 펼쳐졌다.



1. 슬픈 처용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극장1에 들어선다. 가운데 무대를 두고 양측으로 나눠진 객석, 나는 삶과 죽음 사이를 뛰어다녀야 하는 전쟁터를 들여다보게 될 것인가? 무대 양쪽에 걸린 두 벌의 무당 옷. 그리고 공중그네. 무대 끝 한편은 악공들이, 그 맞은편은 긴 끈을 늘어뜨려 만든 흰 막이 있다.

무대 가운데 둥근 조명. 그 한가운데는 무덤처럼 솟은 검은 씨앗 더미. 그리고 그 무덤 위로 염을 한 듯 동여맨 헝겊 뭉치가 시신처럼 놓여 있다. 조명이 어두워지고 박소리가 크게 울린다. 처용(處容)이다. 역신(疫神)을 쫓고 사람을 살린다는 처용이 무덤 주위를 돈다. 그리고 시신을 어루만진다. 그렇다. 그는 사람을 살리는 데 실패한 것이다. 전쟁은 관용의 상징인 처용에게는 곧 실패다. 처용탈의 미소가 이렇게 슬퍼 보인 적이 또 있었을까? 춤사위인 듯, 무술의 동작인 듯 부드러우면서도 절도 있는 동양적인 몸짓의 피지컬 스코어와 화려한 무복(巫服), 몽환적인 미디어아트로 도입부는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인상을 남겼다.

처용이 들어다 옮긴 7구의 시신이 무대에 열을 지어 누워 있다. 무대 옆 흰 막 뒤로 구슬픈 하모니카 연주와 시낭송이 들려온다. 그런데 이들은 전문배우가 아니라 시민배우들이란다. 그들의 포옹을 한껏 받은 샤먼(shaman)과 7명의 배우(한국/젊은이: 1명, 덴마크/망자의 혼: 6명)가 흰 막을 젖히고 무대에 등장한다. “정의가 승리했고, 인간애가 승리했다. 그러나 악과 죽음과 비인간적인 것들도 승리했다. 인간의 선함을 믿으셔야 합니다”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시신을 안고 씻기는 듯한 동작. 시신과 무대천장에서 검은 씨앗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계엄철폐!, 독재타도! 아, 이곳은 5·18 때의 도청 광장이구나... 원작의 베트남과 광주의 도청 광장이 모호하게 겹치는 무대다. 흰 옷을 입은 샤먼과 7명의 배우가 등장하여 염한 시신을 풀어헤친다. 옷 입은 귀리 인형이 들어 있다. 배우들이 귀리 인형의 옷을 벗겨 입자 시간은 전쟁의 시간으로 회귀한다.



2. 이름이 사라진 젊은이
고통은 사라져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전쟁은 젊은이에게 제복을 입히고 그의 이름을 지운다. 한때 그는 혁명의 아이였고,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좋은 친구였지만 누군가 그에게 제복을 입혀 전쟁터에 세운다. 전쟁은 나를 지키기 위해 너를 죽이는 곳. 그래서 전쟁의 일부가 된다는 것은 전쟁을 겪어 보지 않은 이로서도 인간을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행위라는 것을 직감한다.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고통의 후예들이 바로 우리다. 가슴을 치고, 머리를 흔드는 커다란 북소리가 울리고, 깃발이 선다. 전쟁이다!

젊은이의 기억인지, 꿈인지 알 수 없는 시공간이 펼쳐진다. 공중그네에 사람을 매달고 흔든다. 바닥에 끌려가는 것이 사람이다. 엎어진 사람의 가슴팍을 밟는 동작은 어느 사진 속의 군홧발을 자동으로 떠오르게 한다. 그 혼돈의 사이에 탱고 음악이 들리고 춤을 추는 이도 있다. 우쿨렐레를 안고 노래하는 이도, 시신을 모아 치료하려는 여인도. 전쟁 중에도 우리는 각자 무언가를 한다.

무대 위를 뒹구는 젊은이의 절규 “나는 적군이었어!” 자신의 정체성을 의심하는 가슴 아픈 외침... 이 젊은이처럼 일제의 침략, 6 · 25, 민주화의 과정에서 피흘려간 수많은 사람들이 돌아온다면 승리의 미소를 지을까? 슬프고 텅 빈 눈을 가지고 서 있지는 않을까? 누가 누구와 싸운 것일까? 고통은 사라져도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샤먼이 고통 속을 헤매는 그를 끝까지 따르고 있다. 샤먼의 한국어 대사가 망자의 영어로 메아리처럼 반복된다. 배우들이 주고받는 한국어, 스페인어, 영어, 덴마크어, 프랑스어, 슬로바키아어 등 6개 언어는 국가와 인종을 초월하여 전쟁을 묻는 목소리이다.



3. 고를 풀자. 그리고 안아주자.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극이 진행되는 내내 천장에서 뿌려진 300kg의 검은 해바라기 씨가 무대에 무늬를 그린다. 이 검은 해바라기 씨는 시각적 효과뿐 아니라 빗소리인 듯, 소음인 듯 음향으로서도 매우 독특한 장치였다. 생명이 담긴 것 속에 전쟁도 담겼다는 역설일까? 지옥도를 그리는 손으로 해바라기를 심는다.

망자를 위로하는 씻김굿은 오구풀이 – 고풀이 – 씻김 - 길닦음의 순서로 진행된다. 그리고 씻김굿의 고는 망자의 한을 상징하는 것이다. 시작에서 인형의 옷을 걸쳐 입었던 배우들이 다시 옷을 벗어 인형에 입힌다. 그리고 다시 이들을 하나하나 염한다. 이 시신 옆으로 배우들이 눕는다.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의 눈높이가 하나가 된다. 이제 이 가운데로 샤먼이 고를 풀고 지나간다. 고를 푼 자리로 물이 흐른다. 물은 양쪽 스크린에 나무를 그린다. 동양에는 성황당 나무가 있고 서양에는 생명의 나무가 있다. 망자를 위한 이 몸짓이 부디 생명으로 흘러가기를... 등장할 때 시민배우인 어머니의 포옹을 받고 등장했듯이 퇴장 때도 어머니는 배우들을 안아준다.



-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진짜 주인공들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ACC 국제 공동창제작 「전쟁 후에(AFTER WAR)」

무대는 늘 배우가 오릅니다. 그러나 무대의 이야기는 배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그것을 바라보지 않는 관객의 삶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번 이야기에 등장하지 않은 주인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의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 전쟁의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사람들. 한 번도 등장하지 않은 진짜 주인공들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이제 세계는 기후위기, 자원 고갈, 에너지 헤게모니의 다툼과 비대해진 군사력 등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을 백신 전쟁이라고도 합니다. 전쟁의 가능성은 여전히 우리 곁을 떠돌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잊지 않으려는 노력은 아픈 역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노력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전쟁 후에라도 전쟁의 슬픔을 들여다보는 일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슬픔 안에 오래 머무는 것, 외면하거나 섣불리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는 것. ACC가 전쟁 후에 전쟁을 이야기하는 이유일 것입니다.


1) 연극인류학을 창시하고 현대 연극계 3대 거장인 유제니오 바르바가 창단한 북유럽연극실험소-오딘극단(NTL-OT/Nordisk Teaterlaboratorium-Odin Teatret)이다.
2) 피지컬 스코어(physical score), 신체총보: 배우의 즉흥적 움직임을 체크하여 악보의 기호처럼 만들고 이를 통해 총체적인 배역의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작업. 오딘 극단의 독창적 훈련법이다.






  • 글. 박나나 tonana@hanmail.net
    사진. ACC 제공

    2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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