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 일곱 계절을 품은 아홉 정원

동시대 아시아 · 문화예술 전문가의 'ACC 인문강좌' 2022년 그 세번째 강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이 동시대·아시아·문화예술을 주제로, 각 분야 전문가를 초빙하여 진행하는 상반기 ‘ACC 인문강좌’가 이달 7월까지 선보인다. 4월부터 매달 마지막 주 수요일 오후 7시에 열린 ACC 인문강좌는 무료 관람으로 그동안 동물 이야기, 지속 가능한 디자인, 정원의 역할을 다루었다. 남은 한 개의 주제인 재난과 치유는 7월 27일에 진행된다.

ACC가 진행하고 있는 인문강좌는 문화예술·인문사회 전 분야에 걸친 국내외 석학과 전문가를 초청해 새로운 지식과 정보를 시민에게 제공하고 있다. 지난 6월 29일에는 정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베케, 일곱 계절을 품은 아홉 정원’의 강의가 있었다.

이날 강사로 초청된 김봉찬 강연자는 제주에서 나고 자란 제주도 토박이로 자연제주와 더가든에서 근무하며 기획·설계·식물재배·농장관리 등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베케의 전신인 더가든의 재배 농장을 총괄하며 베케를 구성하는 많은 식물을 직접 키웠으며 현재는 정원식물을 재배하는 작은 농장을 운영하며 살고 있다.

강연 중인 김봉찬 대표
강연 중인 김봉찬 대표
강의를 듣고 있는 청중들
강의를 듣고 있는 청중들

베케는 야생의 정원이자 생명과 죽음이 잉태되는 조화로운 공간

‘베케’라는 단어를 처음 접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외국어 같기도 한 이 말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원’과는 잘 어울려 어감에서부터 신비한 힘이 느껴진다. 김봉찬 대표는 ‘베케’를 가리켜 이렇게 말한다. “베케는 야생의 정원이자 생명과 죽음이 잉태되는 조화로운 공간”이라고.

‘베케’는 ‘밭의 경계에 아무렇게나 두텁게 쌓아놓은 돌무더기’란 뜻의 제주도 말이다. 예부터 제주 사람들은 밭을 일구며 나온 돌로 밭의 담을 쌓아 경계를 만들었다. 끊임없이 나오는 돌을 계속 쌓아 올리다 보니 두꺼운 형태의 담이 만들어졌다. 계획하고 쌓은 담이 아니다 보니 베케 여기저기에는 성근성근한 틈이 많다. 그 성근한 돌 틈 사이로 풀과 나무가 자라고, 이끼가 공존한다.

‘베케 정원’은 시간과 공간의 조화로움으로 생태계의 질서가 자연스럽다 70평 규모에 식재된 수종은 50여 종에 불과하다. 생각보다 수종이 그리 많지 않은 이유는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것을 보여주다 보면 단순함이 주는 세련미가 사라진다”는 것이 김 대표가 가지는 정원에 대한 자세다. 베케는 제주의 풍광이 자연스럽게 연출되는 공간 그 자체다.

초봄부터 시작하여 겨울까지 베케에 찾아드는 계절은 일곱 번을 되새김질한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초봄에 이어 봄에는 낙엽수가 깨어난다. 초여름은 정원이 가장 화려해지는 시기로 대 경관을 연출할 여름을 대비한다. ‘핑크뮬리’의 분홍색 물결이 넘실대는 가을을 지나 늦가을에는 가을색으로 가득한 이끼 정원이 장관을 이룬다. 마지막으로 겨울은 모든 죽어가는 생명을 보듬는 ‘틈’의 세계를 나타내고 있다. 베케는 자연의 순리이자 생명 잉태의 공간 그 자체다.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강의하는 김봉찬 대표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강의하는 김봉찬 대표
준비해온 프레젠테이션을 통해 강의하는 김봉찬 대표

점·선·면의 조화로움이 주는 공간 철학

“도시는 건물들이 뭉쳐 있는 면 중심이지요. 그런데 나무가 선 역할을 해 주어 조화를 이룰 수 있어요.” 그의 정원에 대한 철학은 점·선·면의 조화로움이다.

“자연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점·선·면으로 구성되지요. 대단히 복잡해 보이는 형태도 축약하고 단순화 시키면 결국 점·선·면으로 귀결됩니다. 면은 안정감이 있지만 강력한 힘의 무게가 느껴지지요. 점과 선은 변화를 나타내지만 적당한 리듬감과 깊이감을 주어 공간에 자연스러움을 담습니다.” 실제 거칠고 척박한 토양에서 자라는 고산지대나 해안가의 식생은 놀랍도록 단순한 형태를 이룬다는 것이 김대표의 말이다.

상록수가 많은 정원은 빛을 차단해 어둡고 침울하기 쉽다. 형태와 질감이 단단한 상록수는 그 자체로도 경직되어 보이고 어둠을 만들어 정원의 분위기를 무겁게 만든다. 나무를 심을 때 상록수는 가급적 배경으로 배치해 깊이감 있는 어둠을 연출한다. 정원 중심에는 낙엽수를 이용해 빛과 어둠을 조율하는 것이 정원의 어둠과 빛을 밝히는 방법이다.

김대표는 “정원의 규모와 상관없이 깊이감이 없는 정원은 단조롭다”라고 말한다. “깊이감이 느껴지는 정원을 만들기 위해서는 정원을 감추는 것이 필요하고 정원 전체가 한눈에 보이지 않도록 구성해야한다”라고 말한다. 다음 공간의 존재를 암시하되 그것의 형태가 노출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깊이감 있는 정원을 만드는 비결이다. 의미 없는 동선과 담장으로 분할된 공간, 기교가 넘치는 지형, 땅의 흐름을 읽지 못한 실개천 등은 오히려 필요 이상으로 복잡하여 깊이감을 상실시키는 요소들이다.

중첩은 작은 정원에서는 깊이감을 주기 위한 매우 유용한 방법이다. 특히 식물 줄기의 수직적인 중첩은 정원을 깊고 아늑하게 만들어 준다. 이때 선의 굵기와 간격은 서로 달라야 한다. 정면에서 뒤로 갈수록 줄기는 가늘게 배치해야 한다. 이때 찾아오는 어둠은 그 깊이감을 한껏 극대화해주는 오브제다.

작은 것이 더 아름답다

정원에서는 큰 나무에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사물의 크기는 상대적이며 공간의 규모와 구성하는 것들의 관계 속에서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개의 크기보다 전체 공간에서 얼마나 어울릴지가 더 중요하다. 작은 나무는 당장은 미숙하고 초라해 보여도 생명력이 넘치며, 어린 나무는 병충해에 강하고 불리한 조건에서도 잘 견디는 특성이 있다.

작지만 크게 다가오는 나무들도 있다. 오동나무, 가죽나무, 붉나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속성수인데 속성수는 줄기와 가지선이 굴곡 없이 시원하게 뻗고 잔가지가 없어 수관 내부에 여백이 많다. 여백은 사람의 시선을 나무 자체보다는 배경에 스며들게 한다. 여백을 통해 우리는 나무를 전체 경관과 어우러진 모습으로 바라볼 수 있다.

공간의 시퀀스는 하나의 서사와 같다. 정원은 하나의 길로 이어지고 그 중심에는 건물이 있어 공간을 구획한다. 개방된 공간에서 닫힌 공간으로, 빛에서 어둠으로, 초원의 식생에서 숲의 식생으로 이어지는 정원의 변화는 놀라운 경험을 선사한다.

그래서 김 대표는 늘 자신에게 되묻곤 한다. ‘정원은 뭘까? 과거의 정원과 미래의 정원은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럴 때마다 그는 매번 똑같은 답을 내린다. 세상의 모든 정원은 생태정원과 비생태정원 만이 있을 뿐이라고. 김 대표에게 정원은 자연의 질서에 순응하고 자연의 법칙을 따르는 생태정원만이 존재할 뿐이다. 그 공간이 바로 베케 정원이다.

그곳에는 보잘것없는 작은 식물과 곤충들이 조화롭게 움직이며 자연의 질서를 따르고 있다. 그동안 우리가 볼 수 없던 수많은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토양이 숨을 쉬고 나무가 숨을 쉰다. 작은 것들, 알려지지 않은 소소한 것들을 바라볼 줄 아는 시선을 가진다면 정원은 더 좋아지고 아름다워진다.

이번 <인문강좌>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받았다. 조경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서부터 주부에 이르기까지 참여자의 층이 다양했다. 세대를 아우르는 품격 있는 <인문강좌>임이 방증되는 순간이었다.

다음 ACC <인문강좌>는 7월 27일 수요일 오후 7시에 문화정보원 극장 3에서 진행된다. 신형철 문학평론가이자 조선대 교수를 강연자로 초빙하여 하마구치 류스케의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를 통해 '재난·서사·치유'에 대한 고민들을 되짚어 본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강연이 끝나고 청중들과 질의응답 시간을 보내고 있다.




by 윤미혜
mi4430@naver.com
사진
송기호
인문학 교육 아시아
2022 ACC 월드뮤직페스티벌
10여 년 전, 자라섬 재즈페스티벌에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비싼 관람료와 엄청난 교통체증에도 불구하고, 잔디밭에 돗자리 깔고 누워서 혹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재즈를 즐기는 경험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었다. 또 절대 일어나서 춤추지 않을 것 같은 사람마저 일어나게 만드는 현장의 뜨거운 열기 또한 더욱 그때의 기억을 선명하게 했다. 이제 광주에서도 돗자리 깔고 앉아서 월드뮤직을 야외에서 즐길 수 있는 ACC 월드뮤직페스티벌이 매년 열리고 있다. 극장2 실내무대(월드 스테이지)에서 열리는 2개의 실내공연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료로 볼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신기술기반 콘텐츠 랩 창제작 워크숍
21세기 우리는 새로운 매체 시대에 살고 있다. 무엇보다도 컴퓨터라는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고 확산되기 시작한 이후 나타난 변화는 기존의 역사 속에 기재되어 있는 기술적 발명과는 새로운 차원이다. 우리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 그리고 확산과 함께 그것이 기술 이상의 무엇이라는 점을 깨닫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그것은 새로운 문화가 되어 사회를 변화시키고 인간의 삶도 변화시켰다.
<지구의 시간> × 요가 워크숍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하 ACC)은 필자에게 일상에서 경험하지 못하는 새로움을 경험하게 하는 초현실주의 작품 속과 같은 곳이다. 이번에 참여한 <지구의 시간> ✕ 요가 워크숍이 그러했다. ACC는 종종 방문하는 곳이지만 <지구의 시간> ✕ 요가 워크숍을 통해 필자는 또 다른 ACC를 만났다.
ACC 입주작가, 연구·창작활동 본격 시작
2019년 말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세계적으로 퍼져나갔고 인류는 그동안의 경험에 비추어 우리가 이길 것을 의심하지 않으며 행동했다. 그리고 2020년 9월 현재, 그동안 우리가 경험한 적 없는 펜데믹 상황을 겪으며 인류가 패배했음을 느꼈다. 처음 등장한 바이러스에 인류는 속수무책으로 함락당하기 시작했고 처음엔 도시가, 다음에는 나라가, 그리고 세계가 문을 걸어 잠그고 처음 마주친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대처했다.
‘반디산책’ 도심에서 청정세상을 꿈꾸다
‘반디산책’. 이름이 좋다. 네온과 전광판, 자동차 불빛 현란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반디를 벗 삼아 산책을 즐긴다는 상상만으로도 머릿속이 맑아진다. 이 도시의 심장부인 옛 전남도청-국립아시아문화전당 일원에서 반디를 만난다는 상상이다.
마디와 매듭
한 달에 두 번 일 년에 스물네 번 태양이 지나는 시간 간격에 따라 구분된 절기(節氣). 농경사회 동아시아인에게 꼭 필요했던 농사력(農事曆)으로 불리는 24절기는 자연의 순리에 따른 인간의 삶과 지혜가 공존하는 시간의 매듭이다.
《반디산책: 지구와 화해하는 발걸음》 프리뷰
늦여름이 가고 선선한 바람이 시작될 때, 풀벌레 소리와 함께 산책하며 미디어 작품을 감상해 보는 건 어떨까? 가족이나 친구와 함께 산책하면서 즐길 수 있는 2022 ACC 미디어파사드 <반디산책 : 지구와 화해하는 발걸음> 전시가 ACC 일대에서 열린다.
<키자니아 Go! 광주>
아이들의 고민을 시원하게 날려 줄 어린이 직업체험 테마파크 키자니아(Kidzania)가 지난 7월 29일부터 8월 28일까지 한 달 동안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어린이문화원에서 펼쳐졌다. 직업 탐색 놀이공간이자 환상의 세계인 키자니아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설계된 도시공간으로 체험의 몰입감과 생생함을 더했다.
ACC 융복합 문화예술의 관찰과 협업:
예술의 창의성과 주도성
고유 콘텐츠를 활용해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의 우수성을 인증받은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이 최근 광주지역 초·중등 교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2022년 제2차 특수분야 직무연수 ‘ACC 융복합 문화예술의 관찰과 협업: 예술의 창의성과 주도성’을 소개한다.
함께 만나는 아시아의 시
지난 8월 11일, 프로그램 취재를 위해 ACC 예술극장을 찾았다. 8월 4일부터 12일까지 진행된 는 여름방학을 맞이한 청소년을 대상으로 아시아의 다섯 나라, 여섯 명의 시인을, 각 시인이 살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 문화, 그들의 시세계 등을 낭송, 음악, 연극, 영상 등으로 만나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날 내가 ACC에서 만난 시인은 ‘몽골 대표 시인’인 담딘수렌 우리앙카이(Damdinsuren Uriankjai)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