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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아시아문화전당 웹진

호남 선교의 발자취, 유진벨 선교기념관 광주에 온 벽안의 선교사, 유진벨


광주초이스




광주천 변에 자리한 양림동은 옛 광주 읍성의 외곽지역으로 ‘서양촌’이라고도 불렸다. 20세기 초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와 정착한 곳이기 때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선교사 사택, 근대 건축물들이 곳곳에 있다. 펭귄 마을이 유명해지며 알려졌고 고택과 미술관, 기념관 등 볼만한 곳이 있어 광주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가 되었다. 사직도서관에서 호남신학대학교 쪽으로 언덕을 오르면 회색 기와를 얹은 마당 넓은 건물이 있다. 이곳이 광주·전남 지역 선교의 아버지라 불리는 유진벨(배유지) 선교기념관이다. 그가 죽을 때까지 살았던 사택은 6·25 전쟁 때 불이 났고 이후 복원하여 2016년에 유진벨 선교기념관으로 개관했다. 유진벨은 미국 남장로교에서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로 1895년 루이빌 기차역을 출발하여 1904년까지 긴 여정을 거쳐 광주에 와서 양림동에 자리를 잡는다. 유진벨과 그의 동역자들이 낙후한 광주에 교육, 의료, 평등사상 등을 선교와 함께 전파했고 그것은 광주의 근대화를 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금발에 파란 눈을 한 유진벨이 광주에서 해냈던 역사와 그의 가족과 동역자들의 활동들을 이영례 문화해설사와 함께 기념관을 돌아보며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유진벨 선교기념관
유진벨 선교기념관
이영례 문화해설사
이영례 문화해설사

유진벨, 그의 가족과 여정



입구에 들어서면 키 큰 로티벨 묘비석과 유진벨의 흑백 사진이 방문객을 반겨준다. 유진벨의 첫 번째 부인인 로티 벨은 목포에서 선교할 당시 전주에 출장 간 유진벨의 부재중 세상을 떠났다. 한국에 온 선교사 가문은 크게 언더우드 가(Understand family)와 유진벨(Eugene Bell) 가문을 꼽는다. 언더우드는 북장로교가 파송했던 대표적인 선교사였고, 유진벨은 남장로교가 파송한 선교사로 이 두 가문은 4대째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광주·전남 지역에서 활동한 유진벨(Eugene Bell, 1868-1925)은 남장로교의 제2진 선교사로 1895년 2월 샌프란시스코 항구에서 국제선 ‘오세아닉 호’에 오른 후 일본, 제물포, 인천을 거쳐 두 달 만에 서울에 도착해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그의 나이는 27세로 한국어 이름은 배유지였다. 전남지역 개척을 위임받아 1896년 나주로 가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나주지부 설치에 실패해서 목포로 가게 된다. 목포에서 선교 활동 중 아내 로티 벨을 잃고 목포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를 설립한 후 1904년 광주에 선교부를 개설하기 위해 오웬 선교사와 함께 광주로 이사를 온다.

로티벨 묘비석과 유진벨
로티벨 묘비석과 유진벨
유진벨의 발걸음을 따라
유진벨의 발걸음을 따라

유진벨 선교기념관 / 이영례 문화해설사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열강들이 득세하면서 우리나라 역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때였어요. 선교 활동은 자신들의 나라를 알리고 문화를 전파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죠. 그때 당시 광주 동명동 쪽으로 일본인들이 자리를 잡았고 계림동 쪽으로 중국 산동인들이 살고 있었어요. 1896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며 광주에 도청이 지금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 위치에 들어섰어요. 도청에서 200미터 거리, 너무 멀지도 않고 가깝지 않은 곳을 선택해야 했고 이왕이면 목포에서 유달산 아래 살았던 경험으로 산 아래를 찾은 곳이 양림동이었을 거예요. 약 5만 6천 평의 땅을 사들여 이곳에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1층 동선을 따라 발을 옮기면 유진벨의 가계도와 생애, 1904년 첫 예배, 유진벨이 한국에서 활동하며 이동한 연혁, 고향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 선교 활동 등에 관한 것들을 사진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유진벨은 1925년 9월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까지 30년간을 한국에서 활동했다. 유해는 양림동 뒷산 선교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첫 부인 로티 벨과 두 번째 부인 마가렛을 잃었고 아들 역시 죽어 가계는 딸인 샤롯에게로 이어진다. 샤롯 벨(1899-1974)은 두 살 때 어머니를 잃고 미국에서 자라 1912년에 내한하여 군산에서 일하는 윌리엄 린튼(1891-1960)을 만나 일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한국에서 일하는 2대 선교사가 된다. 린튼의 한국어 이름은 인돈으로 6.25 전쟁 중에 거의 모든 선교사들이 한국을 떠나던 중에도 부산에서 피난민 구호 활동을 했고, 1960년 사망할 때까지 생의 대부분을 교육에 힘썼다. 윌리엄 린튼의 셋째 아들 휴 린튼(인휴, 1926-1984)이 3대 선교사다. 1926년 군산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부인 로이스 린튼(1927- )과 함께 한국으로 왔다. 인천 상륙작전에 해군 장교로 참가도 했고 순천에 거점을 두고 전라남도의 산간벽지를 돌며 교회를 개척했다.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니며 교회 개척에 힘썼던 탓에 ‘순천의 검정고무신’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특히 1960년대 순천 지방에 결핵 환자가 병원이 없어 사망하는 일이 많았다. 그의 세 아들도 결핵에 죽었던 탓에 부인 로이스는 순천에 결핵 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웠고, 1996년 은퇴하기까지 35년간 결핵 퇴치를 위해 일했다. 휴 린튼의 5남 1녀 중 둘째 스티브 린튼(인세반, 1950- )과 막내 존 린튼(인요한, 1959- ) 두 형제가 4대 선교사로 스티브 린튼은 유진벨 재단을 설립하여 북한 돕기 운동을 하고 있고 동생 존 린튼은 신촌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소 소장으로 일하며 한국형 응급 구급차량을 직접 설계 제작하여 119 응급구조체계를 마련하는 데 기여했다. 교통사고를 당했던 아버지가 빨리 병원에 도착하지 못하고 택시에서 죽었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희생을 막아보려고 설계했다고 한다. 유진벨에서 시작되어 대를 이은 선교의 열정, 그들의 한국에 대한 사랑이 놀랍기만 하다. 그들의 이런 섬김이 단지 사명 때문이었을까? 아마 한국인만이 가진 특별한 ‘정’에 푹 빠졌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유진벨의 가족사진
유진벨의 가족사진
유진벨의 선교활동
유진벨의 선교활동

유진벨과 양림동의 선교사들

1904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유진벨과 오웬가족, 변창연, 그리고 요리사들이 주민을 초청하여 40여 명이 함께 광주 임시 사택에서 예배드렸는데, 이것이 광주지방 최초의 교회인 양림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1905년 11월 사택을 다시 지어 유진벨이 죽을 때까지 살았고 임시 사택은 내부를 개조하여 진료소로 고쳐 놀란 선교사가 소장을 맡아 문을 열었는데 이 진료소가 성장하여 오늘날 광주기독병원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4번째로 세워진 진료소다.
1대 원장인 놀란부터 우일선, 부란도, 이후 7대 원장까지 광주제중병원의 원장을 역임한 선교사들의 사진과 그들이 힘써 이룬 일들이 기록되어 있고, 1908년 봄에 세워진 숭일학교, 수피아학교의 사진과 숭일학교 초대교장 변요한, 수피아학교 초대 엄언라 교장부터 역대 역임한 교장들 사진과 설명을 볼 수 있었다. 최초의 치과 진료를 시작한 유수마 선교사, 조선간호협회를 만들어 전문인력을 양성한 서서평 선교사 등 아프고 어려운 환자들을 현대 의학으로 도우려는 그들의 노력도 정리되어 있다. 위생과 보건을 모르던 당시 사람들에게 현대 의학으로 눈을 틔워 준 것이다. 그 외 노라복, 원가리, 타마자, 남대리, 도대선 등 많은 선교사가 양림동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에 힘을 써왔다. 기념관 지하에 내려가면 당시 선교사들이 들여와 사용했던 유리관이 씌워진 오일 램프, 언더우드 회사에서 만들었던 타자기, 선교사들이 집필한 책들이 전시되어 있다.


1904년 첫 예배
1904년 첫 예배
지하1층 - 양림동의 선교사들
지하1층 - 양림동의 선교사들

유진벨 선교기념관 / 이영례 문화해설사

“선교사들은 오셔서 문맹을 문명으로 바꿔주기 위한 교육을 했고, 미신을 현대 의학으로 바꿔주는 의료를 펼쳤고, 선교로 양반·천민이 존재하는 계급사회에 평등사상을 뿌리내리게 했어요. 나주에서 반대에 부딪혔던 도청이 광주에 세워지면서 선교 활동도 내륙으로 옮겨오게 되었죠. 숭일학교는 교육을 장려한 고종황제가 하사한 이름이고 수피아 여학교는 수피아라는 여자가 죽어서 언니가 5천달러를 기부한 돈으로 학교를 지어 그 이름이 붙여진 것이죠. 또 우일선 선교사가 와서 한국의 많은 어린이가 질병으로 죽고 어른 역시 수명이 40, 50세인 것을 보고 7천 달러 후원을 받아 그라함기념병원을 지었고 74년 기독교 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어요. 오웬 선교사가 선교활동을 하다가 장흥에서 쓰러져 광주로 가마 타고 오는데 포사이드 선교사가 진료를 위해 급히 광주로 오시다가 길에서 나환자를 보고는 자신의 말에 환자를 태우고 옵니다. 광주 가마터에 나환자를 수용하지만 환자가 몰리자 극동한센병협회에서 후원금을 받아 광주 최초의 나병원도 지어지게 되죠. 이후 최흥종 목사와 서서평 선교사가 걸을 수 있는 나환자 100명과 함께 서울 총독부에 올라가 항의를 해서 그들은 소록도와 여수 예양원으로 거처를 옮겨가게 되죠. 많은 선교사들이 해낸 일들과 그에 얽힌 에피소드를 다 말하자면 몇 시간도 모자라요.”

광주 최초의 나병원
이영례 문화해설사


오늘날 다시 보는 그들의 발자취

유진벨은 미국에 있는 가족에게 한국 생활에 대한 많은 편지를 보냈다. ‘밥은 맛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 음식을 먹기로 했습니다’, ‘복음에 대해선 어떤 것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등의 낯선 문화에 대한 거부감에도 적응하기 위해 노력하며 점점 친화적으로 변해가는 솔직한 생각들을 적어 보낸 편지들이 전시되어 있다. 칠거지악이라고 하여 갖가지 이유로 쫓겨나 갈 곳 없는 여성들을 야학을 통해 글을 깨우치게 했다는 선교 활동 내용도 있다. 기념관에서 마지막 발걸음은 자연스레 영상실로 향한다. 1층과 지하에서 보았던 것들을 정리한 내용이 나오는데 마치 기도실 같은 공간에 사람이 들어서면 자동으로 재생되는 영상을 보게 되었다. 빛바랜 사진 속 옛 광주 모습과 낯선 곳에서 풍토병과 맞서며 복음을 전파하려는 선교사들의 노력을 보며 그때와 완전히 달라진 오늘날 광주에 살고 있는 나를 생각해본다.


지하1층 전경
지하1층 영상실
지하1층 영상실

유니세프 광고에 뼈가 앙상하고 배만 볼록한 아이를 볼 때면 아프리카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아이를 학대했다는 부모가 뉴스에 나오면 평범한 부모님 아래서 클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좋은 나라, 좋은 부모님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이 풍족한 현재에 태어나 살 수 있다는 것도 내가 가진 행복이 아닐까. 병원, 학교, 누구나 평등하다는 인권 등 지금 우리가 일상에서 당연하다고 여기며 누리며 사는 것들에는 선교사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영례 문화해설사께 유진벨 목사뿐 아니라 양림동의 많은 선교사들이 하셨던 일들과 많은 일화와 생활상에 대해 폭넓고 자세한 설명을 들었지만 짧은 지면에 다 적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열정을 다해 설명을 해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선교사묘역에 묻혀진 선교사의 이름들
유진벨의 편지
유진벨의 편지
  • 글. 김옥수 mono755@daum.net
    사진. 황인호 photoneverdie@naver.com


    20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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